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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: 12-01-06 23:09
짐승의 시간 /정대호
 글쓴이 : 이동진
조회 : 4,224  
짐승의 시간

― 김근태 민주지사 영전에

아름다운 연꽃세상에서 부활하십시오.

정대호



우리들의 이 땅이 독재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있을 때

당신은 그 어둠의 둑에 구멍을 내고

맨손으로 막고 섰던 우직한 청년

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민주주의의 이 작은 햇볕도

당신이 온몸으로 견뎌낸 짐승의 시간

그 굴욕의 상처가 밝힌 불이었습니다.



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30분

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을 나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

발가벗겨져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이 혁대로 묶여

칠성판에 엎드리면

발바닥이 종아리가 허벅지가 엉덩이가

살이 터져 피멍이 엉켜

육신은 진흙탕 뻘밭으로 망가져 갔습니다.

―권력의 하수인 개들을 향해서 : 그렇게 물어야지 창자가 터지게



물통 속에 머리박고 의식을 잃어도

다시 정신을 차리면

'나'만은 지켜야지 이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

아직 인간이고 싶었습니다.

―권력의 하수인 개를 향해서 : 더 세게 물어야지



손가락에 전기선을 걸고

온 몸이 짜릿짜릿

의식이 까마득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

아 이렇게 혼을 놓아버릴 수도

다시 정신을 차리는 순간

'나'를 지키고 싶었습니다.

아직 인간이고 싶었습니다

―또 다른 당신은 개들을 향해 : 아 죽고 싶다. 이제 표범이 되어 숨통을 끊어다오

―개들이 하는 말 : 장난으로 재미삼아 해보았는 걸



또 다시 스위치를 걸면

의식이 까무룩 저승길이 보이고

검은 옷의 창백한 얼굴 저승사자가 멀리 보인다

아 이렇게 죽을 수도

다시 정신을 차리는 순간

지금 이렇게 몸이 망가지는 현실도 고발하고 싶었습니다

발가벗고 무릎꿇고

살려주세요,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

그 순간, 너무도 긴긴 시간인 그 순간

당신은 저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혼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

이건 인간이 아닌 벌레가 되는, 짐승의 시간입니다

'나는 짐승이다'

자괴감이 온몸을 감쌉니다.

―미친개가 하는 말 : 미친개에 물렸으니 미친개가 되겠지

―괴로워 마십시오, 그 세월이 짐승의 시간이었습니다.



아 그래도 살아서

이 순간들을 증언해야

그 때부터 조서장에 이름을 쓰면서

시계를 보고 담당경찰관의 이름을 보았습니다

새로운 싸움을 위해

―미친개에 물려도 당신의 영혼은 다시 맑은 연꽃으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.



많은 짐승들은 보았습니다.

인간이 짐승이 되어서 보았습니다.

이제 돌아갈 수 없구나 인간으로

짐승이 되기까지 긴 여정의 고통,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.

너무나 많은 인간들이 미친개가 되었습니다.

―미친개가 하는 말 : 너도 미친개가 되겠지



그러나 당신이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순간

짐승의 시간은 끝나고

연꽃의 시간으로 부활하고 있었습니다.

육신은 망가져 뻘밭에 빠져도

영혼은 맑은 향기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.

―너무 괴로워 마십시오, 그 시대가 짐승의 시간이었습니다.



이제 망가진 육신의 허물을 고이 내려놓았습니다.

진흙뻘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 연꽃이 피어납니다.

이 진흙탕의 세상이 당신의 맑은 영혼을 피웠습니다.

그대 맑은 영혼으로 훌훌 먼 길을 가십시오.

청초하고 맑은 연꽃으로 피어나는 길을 가십시오.

―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