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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: 12-01-19 16:55
전북일보 신춘예 당선작
 글쓴이 : 이동진
조회 : 3,876  

노숙/이영종


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

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마리가

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.



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

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앏게 저며 만든 것

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


동면에 들어간 나무 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

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얇은 배를 혀로 핥다가

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


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

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

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 왔던 것일까



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

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

멧돼지는 침목에 봄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

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

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



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 볼 새끼도 없고

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

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